환자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방법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
봄이면 익숙한 노래가 들리는 것을 보니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봄은 또 오는구나.
제법 산뜻해진 봄바람에 가슴이 설렐 법도 하지만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 출근길은 잔뜩 몸을 움츠리게 한다.
출근길에 앵앵거리는 구급차 소리라도 들릴라치면 나도 모르게 나지막이 내뱉는 한마디 ‘뭐지?’.
그때부터 어떤 환자인지 상상하면서 가슴은 사정없이 벌렁거리고 병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빨라지게 된다.
간호사라는 직업으로 15년을 일했지만 변하지 않은 일상이 되어 버렸다.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신경외과 병동의 일상

간호는 ‘직업이 아니고 사명이다’ 따라서 간호는 ‘질병을 간호하는 것이 아니고 병든 사람을 간호한다’라는 전인간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신규 간호사로 일할 때는 표준간호다 뭐다 간호기술을 익히고 질병을 간호하느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긴장 속에서 일하게 된다. 어느 순간 업무가 익숙해지는 시기가 오면 나도 육체적, 정신적, 감정을 간호하는 진정한 간호사가 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갈등과 좌절을 경험하게 되고 따라서 관계의 대부분인 환자를 만나는 그 모든 순간들에 마음이 가볍지 만은 않다. 현장은 직업과 사명감 사이에서 많은 갈등을 빚으면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오늘도 병동은 야단법석이다. 처치실은 테트리스 게임을 방불케 하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침대에서 탈출하려는 환자들로 들락날락 댄다. 어슴푸레 동이 트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한 명 한 명 병실로 돌아간다. 어쩜 일출시간을 그렇게 잘 아는지, 해가 지면 여기는 북한산 정상과도 같이 메아리 없는 야호가 넘치 다가도 해가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다. 신경외과 병동인 우리 병동에서는 늘 있는 일이다. 잠을 잘 자는 환자는 정말 잘 자고 있는 건지, 혹여 의식이 쳐지는 것은 아닌지 매 순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대화했던 환자가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져 응급수술을 받기도 하고, 수술 후 안정적이던 환자가 갑자기 경련을 해서 상태가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 그야말로 간호사들은 폭풍전야의 초긴장 상태다.

환자 보호자의 멍든 마음까지 살피게 되는 순간들

간호사들의 일과 중 환자를 대면하는 첫 순간은 병실을 순회하면서 그들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의식을 확인하느라 대답을 할 때까지 묻고, 자고 있으면 깨우기도 한다. 또한 동공반사를 확인하느라 눈에 밝은 빛을 들이대는가 하면 근력은 괜찮은지 통증자극을 줘서라도 팔다리를 들게 만드니 환자들에게 간호사는 반갑지 만은 않은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찰들이 환자의 신경학적 변화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고 치료계획을 세우는데 중요한 과정이므로 가장 예민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려고 노력한다. 마비가 있는 환자들의 손발이 되려니 나의 손목이며 허리의 통증은 이젠 내 삶의 동반자가 된지 오래다. 나의 손목과 허리를 지지하는 보호대가 그나마 나 스스로에게 위안을준다. 환자가 휘두른 팔다리에 차이고 꼬집히는 일은 일상이다. 고령화, 100세 시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고령의 환자가 절반 이상이다. 처음 들어보는 육두문자는 오히려 이해하지 못해 기분이 덜 상할 때도 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그러는 거니 이해해요”라고 위로라고 하는 보호자의 말이 한없이 섭섭할 때도 있지만 누군가의 남편을, 아빠를, 아들을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보호자의 마음은 어떠할까? 육체에 묶인 환자도 힘들겠지만 낯선 환자의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의 마음은 또 한 번 시퍼렇게 멍이 들었으리라.

환자의 성장이 곧 나의 자부심과 성취

급성기가 지나고 신경학적으로 안정이 되면 재활 치료가 시작된다. 이때 환자는 본인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우울해지는 감정의 변화들이 찾아온다. 이 시기야말로 간호사의 역할이 가장 빛날 때이기도 하다. 내면에서 철저하게 나와의 외로움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환자에게 간호사의 관심 있는 한마디는 용기와 희망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만든다. 침상에 갇혀만 있던 환자가 어눌하지만 자신의 의사를 말로 표현하고 비록 보조기에 의지하지만 걷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그 순간 나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스스로에게 대견함 같은 야릇한 성취감을 느끼면서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낀다. 이것이 지금의 나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 “간호사는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어려움을 겪고 성의를 다하는 태도나 과정은 자신의 긍지와 가치관에 대한 문제이지 누구를 위한 희생은 아니다.”라는 나이팅게일의 말을 좋아한다. 나는 환자를 간호하고 그들과 공감하면서 환자들이 스스로 한 발자국 걸으면 나도 그만큼 성장해 감을 느낀다. 오늘도 나는 나의 직업에 긍지와 보람을 가지고 환자를 간호한다. 그게 내가 나를 사랑하고 환자를 사랑하는 방법이다.